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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든 교육자

좋은 교육은 무엇인가?

정구영
정구영 Nov 13, 2025
 

망치를 든 교육자 - 편안함과 성찰 사이에서

어제, 나는 비교당했다

"앞 시간 강사님은 쉬는 시간도 20분이나 주시고, 영상만 보면 되니까 편했는데요."

‘100년 OO를 위한 회고와 성찰’이라는 주제로 진행한 어제 온라인 라이브수업. 정해진 15분 쉬는 시간을 지키고, 학습자들이 서로 소회의실에서 대화할 수 있도록 돕고, AI챗봇과 질문하며 생각을 정리하도록 설계한 나의 4시간은, 앞선 강사의 '배려'와 비교되며 불편함으로 기억되었다. 100명의 학습자가 있을 때 나의 1시간은 학습자의 100시간이라는 마음으로 준비한 콘텐츠는, 예능 영상과 드라마 클립으로 채워진 '편안한 시간'보다 못한 평가를 받았다.

씁쓸했다. 동시에 깊은 질문이 떠올랐다.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

니체의 망치 - 어제의 나를 부수는 교육

니체는 말했다. "나는 망치를 들고 우상을 두드린다"고. 교육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교육은 학습자가 가진 익숙한 틀을 두드리고, 때로는 부수는 일이다. 어제의 나를 오늘도 그대로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다.

실존주의 교육철학의 핵심은 명확하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며, 끊임없이 자기를 갱신해가는 존재다. 교육은 그 과정을 촉발하는 망치가 되어야 한다. 불편하더라도 질문하게 하고, 익숙한 답을 의심하게 하며, 동료와 부딪히며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100년 OO를 위한 회고와 성찰'이라는 주제가 요구하는 교육의 본질이 아닐까?

그런데 학습자들은 왜 불편해했을까? 생각하는 것, 대화하는 것, 자기 조직의 문제를 직면하는 것이 왜 부담이 되었을까?

공리주의의 함정 - 최대 다수의 만족이라는 착각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공리주의의 유명한 명제다. 교육 현장에도 이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 가능한 한 많은 학습자를 만족시키는 것, 불만을 최소화하는 것, 피드백 점수를 높이는 것. 이것이 좋은 교육의 기준처럼 작동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 생각할 필요 없이 듣기만 하면 되는 내용
  • 예능과 드라마 영상으로 시사점 보다는 흥미만 돋우는 시간
  • 규정보다 긴 쉬는 시간으로 얻는 '배려받는 느낌'

학습자들은 만족한다. 편했으니까. 힘들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빨리 갔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변했는가? 3개월 후, 1년 후 그 교육이 그들의 의사결정에, 조직 문화에, 100년 OO를 향한 여정에 무엇을 남겼는가?

최대 다수를 만족시키려다 보면, 교육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해 흐른다. 불편함을 제거하고, 생각을 요구하지 않으며, 변화를 촉구하지 않는다. 양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교육. 이것이 공리주의적 접근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의사는 진통제만 처방하지 않는다

비유해보자. 환자가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를 때, 환자는 "아프게 하지 말고 진통제나 주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사는 안다. 진통제만 주면 당장은 편하지만, 병의 원인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짜 치료는 아픈 곳을 직면하게 하고, 때로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안고서라도 건강하기 바라는 간절한 의지로 수술대에 올리는 것이다.

교육자도 마찬가지다. 학습자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다를 때, 교육자는 선택해야 한다. 당장의 만족도를 높일 것인가, 아니면 장기적 성장을 위한 불편함을 제공할 것인가.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배려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진짜 배려는 편안함이 아니라, “필요한 불편함”을 주는 것임을.

쉬움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쉽고 편한 교육 자체를 비판 할 수는 없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한 지점이다.

'생각하기 싫게 만드는 쉬움'과 '생각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는 쉬움'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학습자를 수동적 소비자로 만든다. 영상을 보여주고, 웃게 하고, 시간을 보내게 한다. 머리를 쓸 필요가 없으니 편하다. 그러나 교육이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후자는 복잡한 개념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어려운 질문을 접근 가능한 단계로 나누며, 학습자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다. 쉽지만 얕지 않다. 명료하지만 깊이를 잃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교수자의 역량이다.

어려운 것을 깊이를 잃지 않고 쉽게 풀어내는 것. 이것은 사려 깊은 설계의 결과다. 학습자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핵심을 명확히 하며, 단계적으로 이해를 쌓아가도록 돕는 것. 이런 쉬움은 학습자를 존중하는 진심에서 나온다.

반면, 진심이 빠진 쉬움은 다르다. 교수자가 환심을 사기 위해, 인기를 얻기 위해, 평가를 잘 받기 위해 제공하는 쉬움. 이것은 학습자를 무시하는 행위다. "당신들은 어차피 깊이 생각하지 않을 거니까, 그냥 편하게 있다가 가세요"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교육이 조직과 기업에 손해를 끼친다는 점이다. 교육에 투자한 시간과 비용은 학습자의 실제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생각 없이 흘러가는 교육은 투자 대비 아무런 성과를 만들지 못한다. 결국 학습자도, 조직도, 손해를 보는 구조가 된다.

교육자의 선택 - 박수보다 침묵을 선택할 용기

어제 나는 비교당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학습자들에게 편안한 박수가 아니라, 불편한 침묵을 선물하고 싶었다. 영상을 보고 웃는 순간이 아니라, 동료와 대화하며 자기 조직을 돌아보는 순간. 쉬는 시간에 담배 피우며 쉬는 시간이 아니라, 챗봇과 질문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 그것이 '100년 MG를 위한 회고와 성찰'이 필요로 하는 교육이라 믿었다.

22년간 교육 현장에서 배운 것이 있다. 당장의 만족도와 장기적 성장은 다르다는 것. 학습자들이 3년 후 기억하는 교육은, 편했던 교육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킨 교육이라는 것.

물론 쉽게 가르치되 깊이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최선이다. 사려 깊은 설계로 학습자가 생각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는 교육.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필요한 불편함까지 제거해서는 안 된다. 생각하는 과정, 대화하는 과정, 자기를 직면하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불편하다. 그 불편함을 견디는 것이 성장이다.

교육자는 선택해야 한다. 학습자의 환심을 살 것인가, 학습자의 성장을 도울 것인가. 편한 박수를 받을 것인가, 불편한 변화를 촉발할 것인가.

나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것이 100명의 학습자 앞에 선 나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100시간을 책임지는 교육자로서, 망치를 든 손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교육은 양동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지피는 것이다."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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