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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위에서 산다는 것 - 직장인의 일상에서 발견하는 선택의 철학

내가 사는 비트윈(Between) 세상

정구영
정구영 Dec 3, 2025

<이미지. Unsplash>

경계 위에서 산다는 것 - 직장인의 일상에서 발견하는 선택의 철학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우리의 삶을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생성되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는 사물과 사물 사이, 선택과 선택 사이에 존재하는 '사이(between)'라는 공간에 주목했다. 이 사이의 공간이야말로 우리 삶이 실제로 일어나는 장소이며,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하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매일같이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들과 마주한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경계는 시작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것인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실 것인가. 점심 메뉴로 짬뽕을 선택할 것인가, 짜장면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사소한 선택들이 하루를 채운다.

하지만 일터에서 우리가 진짜 마주하는 경계는 훨씬 더 날카롭다.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가, 정확하게 처리해야 하는가. 직원들을 세세하게 관리해야 하는가, 큰 틀만 주고 자율권을 보장해야 하는가. 따뜻한 긍정의 피드백을 줄 것인가, 따끔한 성장 피드백을 줄 것인가. 좋은 관계를 위해 먼저 다가갈 것인가, 다가와 주기를 기다릴 것인가. 여럿이 함께 모여 일할 것인가, 혼자 조용히 집중할 것인가. 손편지로 마음을 전할 것인가, 이메일로 효율적으로 소통할 것인가.

경계 인식: 날선 경계를 직시하기

들뢰즈의 철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경계 위에 서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그저 관성대로, 습관대로 선택한다. 상사가 요구하면 무조건 빠르게, 동료가 불편해하면 무조건 조용히, 팀원이 실수하면 무조건 따끔하게.

하지만 실제로는 매 순간이 양자택일이 아니다. 빠름과 정확함 사이에는 수많은 지점들이 존재한다. 세세한 관리와 완전한 자율 사이에도 무수한 농도의 차이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경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극단만을 선택지로 본다는 점이다.

스타일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엔 이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결과의 차이가 너무 크다. 한 직원에게 효과적이었던 방식이 다른 직원에게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어제 급하게 처리한 일이 오늘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낸다.

들뢰즈가 말하는 경계 인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내가 지금 어떤 경계 위에 서 있는지를 명확히 자각하는 것. 이것이 A인가 B인가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멈추고, 내가 실제로는 A와 B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사이 공간이 사실은 무한히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주도적 선택: 내가 서 있을 자리를 정하기

경계를 인식했다면 이제 선택할 차례다. 상사가 1시간 안에 일을 해오라고 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대부분은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인다. "네, 알겠습니다"라며 무조건 수용하거나, 속으로 불만을 품으면서도 겉으로는 순응하거나.

하지만 주도적 선택이란 이 둘과는 다른 제3의 길이다. "1시간이면 초안 수준은 가능하지만, 완성도를 높이려면 2시간 정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느 수준을 원하시나요?" 혹은 "2시간을 주시면 생각하는 시간, 자료를 찾는 시간, 검토하는 시간을 포함해서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협상 기술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이 서 있는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경계 위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지점을 스스로 결정하는 행위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시간 안에 일을 끝내는 것만이 아니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시간 안에 상사의 기대를 충족하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다.

상사는 이번 한 번만 보는 것이 아니다. 상사는 당신이 갈수록 일을 더 잘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당신은 단순히 주어진 일을 소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과정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하는 시간 안에 생각하는 시간, 쉬는 시간, 더 나은 방법을 찾는 시간이 포함되어야 한다.

주도적 선택이란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먼저 정하고, 그 결과를 만들어낼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좋은 상사가 되어간다는 것은 한 가지 스타일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결과를 정한 뒤, 실제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낼 사람처럼 말과 행동을 조율해 가는 것이다.

 

<이미지. Unsplash>

표현: 내 안의 소리를 밖으로 꺼내기

경계를 인식하고 주도적으로 선택했다면, 이제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 들뢰즈에게 표현이란 단순히 생각을 말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표현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행위다.

많은 직장인들이 속으로는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상사의 지시가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알겠습니다"라고만 답한다. 동료의 접근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보면서도, "괜찮아요"라고만 한다. 팀의 방향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침묵한다.

이분법에 빠지지 말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무작정 반대하라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순응하라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고이 자리 잡고 있는 무언가를 밖으로 꺼내되, 그것을 건설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기술을 높여 가라는 것이다.

"1시간 안에 하겠습니다"와 "2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이에는 수많은 표현 방식이 존재한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이런 결과물을 원하시는 것 같은데, 1시간이면 초안 수준이고 2시간이면 완성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을 원하시나요?" 같은 방식으로. 이렇게 표현하면 당신은 일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더 나은 결과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된다.

표현의 기술이란 바로 이것이다. 내 안의 진실을 밖으로 꺼내되, 그것이 상대방에게, 조직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건설적인 방식이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은 연습을 통해서만 향상된다.

반복 학습: 경험을 통해 성장하기

들뢰즈의 철학에서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다. 진정한 반복이란 매번 다르게 반복하는 것, 즉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이다.

당신이 이번 주에 상사에게 "2시간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리고 실제로 2시간 만에 좋은 결과물을 냈다고 하자. 이것이 바로 경험이다. 이 경험에서 당신은 무엇을 배웠는가?

정직하게 시간을 요청했을 때 상사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추가로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그 시간 동안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자료를 찾고, 어떤 관점을 추가했는가? 그 결과 만들어진 결과물이 1시간짜리와 비교해 어떻게 달랐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바로 배움의 교훈이다. 그리고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당신은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 다르게 선택할 수 있다. 어쩌면 이번에는 1시간 30분이 적절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3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이제 단순히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시간이 필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주어진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매번의 경험을 통해 조금씩 더 나은 방식을 찾아가는 것이다. 상사가 진짜 원하는 것은 이번 일을 끝내는 것만이 아니다. 상사가 진짜 원하는 것은 당신이 점점 더 성장해서, 앞으로는 더 어려운 일도 맡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날선 경계에 대한 인식, 주도적인 선택, 경험을 통해 얻은 배움의 교훈을 표현하는 실험. 이 세 가지의 반복이 당신을 성장시킨다.

경계 위를 걷는 연습

들뢰즈가 말하는 '사이'의 철학은 결국 이것이다. 세상은 A 아니면 B로 딱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A와 B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그 사이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사는 곳이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곳이며,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곳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실지는 사소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당신이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다. 오늘 날씨는 어떤가? 내 컨디션은 어떤가? 오후에 중요한 회의가 있는가? 이 모든 것을 고려해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적합한 선택을 하는 것.

하물며 일에서의 선택은 더욱 중요하다. 무작정 닥치는 대로 하는 것보다, 정말 급한 사정이 아니라면 마음속에 원칙을 가지고 나의 성장을 닦는 시간 쓰임새를 만들어 보라. 날선 경계를 인식하고,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그것을 건설적으로 표현하고, 경험에서 배운 교훈을 다음 선택에 반영하는 것.

이것이 바로 경계 위를 걷는 연습이다. 이 연습을 통해 당신은 단순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통해 성장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야말로 조직이 진짜 원하는 사람이고, 당신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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