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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 전문성은 어디에 있는가

AI로 과정을 생략하고 즉시 결과를 얻게 되며 절약된 시간은 소비가 아닌 사유와 관계로 가져가야 한다.

정구영
정구영 Dec 5, 2025

<이미지. Unsplash> 도구를 잘 쓰는 사람 vs 도구를 통해 자신만의 사유를 확장하는 사람

AI 시대, 전문성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학위 논문을 작성하는 후배들을 보면 묘한 감정이 든다. AI가 없던 시절, 연구의 목적과 의의를 정립하고 적절한 연구방법론을 선택하며 과정과 결론에 이르는 긴 호흡을 만들어가던 때가 있었다. 쓰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쓰고 있는지 수없이 읽고 수정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아이디어와 주제, 방향, 사례 정도를 입력하면 탄탄하게 줄기가 잡힌 개요가 나온다. 각 장별 연결 흐름의 밑그림이 뚝딱 만들어진다. 논리적 글쓰기라는 점에서 이 흐름을 지도교수와 논의하면 수용 가능성은 경험상 90%가 넘는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며 칭찬일색인 경우도 허다하다.

이 묘한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부러움도, 비판도 아니다. 오히려 불안에 가깝다. 기술이 사유의 과정을 대신할 때, 우리는 무엇을 잃는가라는 질문 때문이다.

목적이 다르면 도구의 의미도 달라진다

직장인이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AI를 활용하는 것과 학위논문을 쓰는 연구자가 AI를 활용하는 것은 겉보기엔 같아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직장인에게 AI는 효율성의 도구다. 한정된 시간 안에 설득력 있는 문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다. 회의 자료, 제안서, 보고서는 결과물 자체가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지, 논리를 어떻게 구성했는지는 부차적이다. 상사가 납득하고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AI가 초안을 만들어주고 그것을 다듬는 방식은 이 맥락에서 매우 합리적이다.

그러나 학위논문을 쓰는 사람에게 AI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논문은 단순히 결과물이 아니라 사유의 흔적이다. 연구 문제를 설정하고, 선행연구를 검토하며, 방법론을 선택하고, 데이터를 해석하는 전 과정이 바로 그 사람의 전문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논문을 쓴다는 것은 결국 "이 분야에서 나는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인가"를 스스로 발견하는 일이다.

만약 AI가 이 과정의 핵심을 대신한다면 어떻게 될까. 개요는 완벽하지만 왜 이 구조여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연구자. 선행연구는 빼곡하지만 자신의 연구와 어떻게 다른지 말하지 못하는 전문가. 그들은 논문은 완성했지만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은 형성하지 못한 채 학위를 받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비단 학위논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직에서 승진을 위해, 성과를 위해 AI를 활용하는 것과 자신의 전문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AI를 활용하는 것 역시 근본적으로 다른 행위다. 전자는 도구를 잘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후자는 도구를 통해 자신만의 사유를 확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계에 머무르는 법

들뢰즈는 우리에게 이분법의 함정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AI를 전면 거부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 둘 다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경계(in-between)'란 양극단 사이의 타협점이 아니라, 양쪽을 동시에 사유할 수 있는 긴장의 공간이다.

AI 시대의 전문성도 마찬가지다. AI를 거부하면서 과거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AI가 만들어준 결과물을 그대로 수용하며 사유의 과정을 포기하는 것 역시 전문성의 포기다. 진짜 전문성은 그 경계에서 만들어진다.

이 경계에 머무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AI가 제공하는 구조를 받아들이되, 그것을 의심하는 태도다. "왜 이런 흐름인가" "이 논리에서 빠진 것은 무엇인가" "나라면 어떻게 달리 구성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AI의 개요는 출발점이지 정답이 아니다.

둘째, AI를 통해 절약한 시간을 더 깊은 사유에 투자하는 태도다. 자료 정리나 형식적 글쓰기에 들던 시간을 줄였다면, 그 시간을 핵심 질문을 벼리는 데, 현장과 이론을 연결하는 데, 동료와 대화하는 데 써야 한다. 효율은 사유를 회피하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 사유를 심화하기 위한 조건이어야 한다.

셋째, AI와의 협업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는 태도다. AI가 제시한 관점이 낯설다면, 그것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영역이 있다는 신호다. 그 낯섦을 회피하지 않고 탐구할 때 전문성은 확장된다. AI는 거울이다. 그 거울에 비친 나의 사유가 얼마나 협소한지, 혹은 얼마나 독창적인지를 보여준다.

<이미지. Unsplash> 현장의 문제와 마주하고, 동료와 부딪히고, 이론과 씨름하는 과정

전문성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들뢰즈의 또 다른 통찰은 존재가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는 점이다. 전문성 역시 마찬가지다. 지식을 머릿속에 축적하는 것이 전문성이 아니라, 현장의 문제와 마주하고, 동료와 부딪히고, 이론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전문성이 생성된다.

AI 시대 이전에도 전문성의 본질은 같았다. 논문을 쓰면서 지도교수와 싸우고, 동료 연구자와 논쟁하고, 데이터 앞에서 좌절하고 다시 해석을 시도하는 그 과정이 연구자를 만들었다. AI는 그 과정의 일부를 생략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과정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AI를 통해 과정을 생략하려 한다는 점이다. "어차피 AI가 해주는데 왜 고생하나"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전문성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논문 한 편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논문을 쓰면서 연구자로서 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AI 시대의 전문성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가.

AI를 배제하지 말되, 의존하지도 마라. AI가 제공하는 틀을 활용하되, 그 틀 안에서 자신만의 질문을 발견하라. AI가 절약해준 시간을 소비가 아닌 사유에 투자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AI와의 대화를 혼자만의 작업으로 끝내지 말고 현장과 동료, 이론과의 관계 속으로 가져가라.

진짜 전문성은 AI가 만들어준 개요 너머에 있다. 그것은 "왜 이 구조인가"를 질문할 수 있는 능력, "이 논리로 현장을 설명할 수 있는가"를 검증하는 태도, "동료는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하는 관계성 속에 있다.

AI는 당신의 사유를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사유를 포기하는 순간, AI는 당신의 전문성까지 대신하게 될 것이다. 경계에 머무르라. 그곳에서 당신만의 전문성이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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